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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59. <부정공>창규(彰奎)配 유인이천서씨묘표(孺人利川徐氏墓表)
1. 문헌 목록 〉21. 21世 〉61. <부정공>기운(淇運)配 유인경주김씨묘갈명(孺人慶州金氏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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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부정공>창규(昶奎)配 정부인완산이씨묘비문(貞夫人完山李氏墓碑文)
(부정공후)21世창규(昶奎)配 정부인완산이씨묘비문(貞夫人完山李氏墓碑文) 盖自上古爲女子有貞靜之德克備閫範如桓少君者果幾人乎哉嘉善大夫吏曹參判趙昶奎齊貞夫人李氏之先行叔季鮮類而當與少君爲儔焉夫人系出完山而以孝寧大君爲先祖曾祖匡臣祖潤璿父在箕外祖安東權得永 憲廟戊戌九月三日夫人生才藝敏捷凡於紡績多能於人早失所恃克修内則令譽播著十九歸于趙氏以敬以順無違其志家窮食貧少無憂色處之晏如也親家悶其飢寒分與土地辭而不受曰貧富在天况此己出嫁之女不必如是軫念也終不受專心治生冬夜夏暑忍飢織紝積年累功終免屢空食不珍需僅救其飢衣不華侈徒禦其寒其子鍾協以飽煖吿之夫人喟然曰無論男女惰身懈事循例成家者難須勤儉則可生矣未聞有懈惰而能生也愈勤愈儉匧無私貨閨無私畜輔佐君子笑不至矧怒不至詈愼黙寡言語不出門雖跬歩不妄行頃刻不傲遊其夫性嚴恐不適意自至老終始如一躬執爨供滋味不厭不改其子吿之曰暮年勞力無異芳年恐或成疾夫人戒之曰一生忍耐以含黙爲專主不然家道必至於쁉離故也且死生有命勞何爲病非爾所甚懼也丙辰冬忽病臥累月夢折三筍語其子曰來三月上旬内吾將逝矣果至翌年丁巳三月八日卒夢雖小事於此可知夫人貞靜底德性畜積於内而發見於夢寐也墓用魯人禮葬于順天住岩尺坊峙負艮原趙氏系出玉川遠有代序簪纓相傳龍驤衛副護軍得燁淑夫人興德張氏其舅姑也生一男四女男即鍾協無子以從弟鍾萬之子道洙爲嗣女適朴泰俊張基萬安斗炯李馨淳也鍾協妙年志學摳衣于我先考淵齋先生得聞爲己之實矣及山頹之慟無所依仰又禍延天只攀號靡逮摭錄夫人懿行請余表隧之文余雖不文揆以蓬麻之誼終不忍辭猥書石陰曰善哉夫人之行也勤儉之德愼黙之操雖古之女士猶有不能及而私無畜貨笑不矧怒不詈是禮經遺訓而夫人能行之善哉夫人誠可謂女中君子也歟盖使此善行採入於列女傳中宜爲不泯於千百載可也若無今日勒石後雖有編述自何以考信哉鍾協之所懇非但出於顯親之誠亦有待焉余感其誠而撰次如右 成均館 進士 德殷 宋哲憲 撰 (부정공후)21世창규(昶奎)配 정부인완산이씨묘비문(貞夫人完山李氏墓碑文) 대개 상고로부터 여자가 정정(貞靜)한 덕이 있어 능히 규중 법도를 환소군(桓少君)같이 갖춘 자 과연 몇 사람인가? 가선대부 이조 참판 조창규(趙昶奎)의 배 정부인 이 씨의 착한 행실은 말세에 드문 일로 마땅히 소군으로 더불어 짝할 만하다. 부인은 전주 이 씨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선조이고 증조는 광신(匡臣) 조는 윤선(潤璿) 부는 재기(在箕)이며 외조는 안동 권득영(權得永)이다. 헌종(憲宗) 무술년(一八三八) 九월 三일에 부인이 출생하여 재예가 민첩하였으며 무릇 여공이 보통 사람보다 우수하였다. 일찍 자친을 잃고 능히 내칙을 닦아 아름다운 소문이 파다하더니 十九세에 조 씨에게 출가하여 순하고 공경으로써 그 뜻을 어김이 없고 집안이 가난하나 조금도 근심한 빛이 없이 처신이 안연하였다. 친가에서 주리는 것 참는 것을 불쌍히 여겨 땅을 나누어 주니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빈부는 하늘에 달렸다. 하물며 이미 출가한 딸을 그처럼 진념할 것이 없다.」 하고는 마침내 받지 않고 오로지 살림에 부지런히 마음을 써 겨울 밤, 여름 더위에 주림을 참고 길쌈하여 여러 해 공을 싸서 마침내 독이 자주 빈 것을 면하였다. 그러나 좋은 반찬을 먹지 않고 좋은 옷을 입지 아니하니 그 아들 종협(鍾協)이 배부르고 따뜻하게 살자고 하니 부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무릇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몸을 편안히 하며 일을 게을리 하고서 성가하기는 어렵다. 모름지기 근검하면 살 수 있으나 게으르고 능히 잘사는 자를 듣지 못하였다.」 하고는 더욱 부지런히 하고 더욱 검약하였으나 상자에는 사사로운 돈이 없고 집에는 사사로운 저축이 없이 군자를 보좌하였다. 잇몸이 드러나게 웃지 아니하고 성 내되 꾸짖지 아니하며 삼가고 침착하여 말이 적어 문밖에 소리가 나지 않고 비록 반걸음이라도 함부로 걷지 아니하였다. 군자의 성품이 엄하여 뜻에 맞지 아니할까 두려워 일생 동안 종시 여일하게 친히 부엌일을 맡아 반찬을 공진하니 그 아들이 고하여 말하기를, 「늙어서 소시처럼 애쓰시다가 병환이 나실까 두렵습니다.」 하니 부인이 훈계하되, 「일생을 참고 함묵한 것으로써 주장을 삼은 것은 조금 방심하면 가도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 사생은 명에 달렸으니 일을 한다 해서 어찌 병이 나겠는가? 네가 심히 두려워할 바 아니로다.」 하였다. 병진년 겨울에 문득 병이 나서 여러 달 누웠는데 꿈에 죽순 三개를 끊고 그 아들에게 말하되, 「돌아온 三월에 내가 장차 갈 것이다.」 하더니 과연 다음 해 정사년 三월 八일에 졸하니 꿈이 비록 적은 일이나 이에 부인의 정정한 덕성이 안에 쌓였다가 꿈에 발현된 것을 알겠도다. 묘소는 노나라 사람 예를 써서 순천 주암 척방치 간좌언덕에 장사하였다. 조 씨의 관향은 순창으로 멀리 대서가 있어 관작이 서로 전하였고, 용양위 부호군 득엽(得燁)과 숙부인 흥덕 장 씨(興德張氏)가 그 시부모이다. 아들 종엽에게 아들이 없어 종제 종만(鍾萬)의 아들(道洙)로 후사를 삼았으며 딸은 박태준(朴泰俊), 장기만(張基萬), 안두형(安斗炯), 이형순(李馨淳)의 처이다. 종협이 묘년에 학문에 뜻을 두고 나의 선고 연재(淵齊) 선생에게 옷을 걷어들고 위기지학을 배웠다. 산이 무너진 슬픔을 당하여 의지할 바 없더니 또 화가 천지에 미침에 더위잡고 부르짖으며 미치지 못하고 부인의 아름다운 사행을 주워 모아 나에게 묘도에 표할 문자를 청하니 내가 비록 글을 못하나 세의로 사절치 못하고 외람되게 다음과 같이 쓴다. 착하도다. 부인의 행실이여! 근검의 덕과 신묵의 조행은 비록 옛적 여사라도 오히려 능히 미치지 못하겠고 사축한 재화가 없으며 이를 드러내지 않고 꾸짖지 아니한 것은 예경 유훈으로 부인이 능히 행하였으니 착하다 부인이여! 진실로 가히 여중군자라 이르리로다. 대개 이 선행으로서 열녀전 가운데 삽입하면 마땅히 천백 년을 지나도 인몰되지 아니할 것이다. 만일 이제 돌에 새기지 아니하면 후일에 비록 편술하고자 하여도 무엇으로 고증할 것인가? 종협의 간청한 바는 다만 어버이를 나타낸 정성에서 뿐만 아니라 또 기다린 것이 있으므로 내가 그 성의에 감동하여 이상과 같이 찬술한다.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덕은(德殷) 송철헌(宋哲憲)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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